작 품 명  :  開卷垂簾(책을펴고,발을 내리니)

규     격  :  70*140

작품내용

開卷神遊千載上하고, 개권신유천재상
垂簾身在萬山中이라. 수렴신재만산중

책을 펴니 내 정신은 천년의 세월 속에서 노닐고,
발을 내리고 보니 내 몸은 만 겹의 산속에 있네.


중국 청나라 때의 서예가인 등석여의 서예 작품에서 본 글이다. 책은 참 신비롭다. 책을 펴면 그 안에서 천 년 전의 인물이 남긴 말도 들을 수 있고 행적도 볼 수 있다. 뿐만 아니라 책을 펴면 미래도 내다볼 수 있다. 다가오는 시대를 짐작하고서 새로운 세계에 대처할 지혜를 배울 수 있다. 그래서 책을 펴든 사람은 행복하다.

언제라도 내 방의 발만 내리면 시끄러운 세상과 인연이 끊긴 듯이 나만의 세계에 침잠할 수 있다면 그런 내 방이 바로 만 겹의 산 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? 깊은 산 속이 따로 없다. ‘대은(大隱)은 곧 시은(市隱)이다’라는 말이 있다. 진정으로 큰 은거는 시장 속에 은거한 것이라는 뜻이다. 시장 속에 은거한다는 것은 시장 속에 살아도 마치 만 겹의 산 속에 사는 것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. 그러니 시은(市隱)보다 큰 은거가 어디에 있겠는가?
그런데 누가 능히 그런 시은(市隱)을 할 수 있을까? 마음이 고요한 사람, 물욕에 빠지지 않는 사람, 세상에 통달한 사람만이 가능하다. 책을 폄으로써 언제라도 천 년의 세월을 오가며 노닐 수 있고, 발만 내리면 만 겹의 산 속에 든 듯이 조용히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, 정말 부러운 사람이다. 그러나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.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으니 결국 인생은 마음 다스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.
< 부안독립신문/김병기교수의 명구>